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진상 규명 ==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암살이 정치적 배경을 지녔음에는 당시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며, 사건 발생 이후 지속적으로 암살의 동기·이유, 배후 조종세력, 이승만·한국정부·미국의 개입여부 및 책임 등이 주요한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미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도진순은 기존에 간행된 여러 기사들과 안두희 등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는 한편 1949년 전후 김구의 정치노선을 집중분석했다. 도진순은 암살작전의 전개과정을 4단계로 분석하며, 암살배경으로 국내 및 미국과의 관련을 추적했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그의 견해를 반영하여「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1915)|김지웅]]이 암살 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안두희]]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 쪽이었다. 즉,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군인)|김창룡]] 당시 방첩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한필동]] 당시 1연대 헌병대장에 따르면 김창룡은 1연대 정보과장으로 지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었으며[* 백범 김구의 차남인 [[김신]]도 당시 계급 및 직위를 근거로 하여 김창룡 개입설엔 부정적이다.]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과 장은상 포병사령관이 비밀리에 주도하였다고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3698_30556.html|증언했다]]. 한편, 2001년 역사학자 정병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C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stration : NARA)에서 안두희가 미군방첩대(CIC)의 요원이자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의 단원이었다는 문서를 발굴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암살과 관련해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제기가 있었다. 특히 백의사 및 백의사 사령 염동진의 정체, 김구와의 관계, 백의사의 암살관련여부, 김구의 쿠데타 가능성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후 정병준은 백의사·염동진과 김구의 관계, 암살과 반공·반북운동의 상관관계, 암살의 정치적 배경, 안두희의 경력 및 활동 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